나이키 에어 포스 1: 농구화로써의 탄생 AIR FORCE 1 Birth for the Court
나이키의 상징적인 모델 중 하나인 에어 포스 1(Air Force 1)이 어느덧 40주년을 맞이했다. 운동화 역사 약 120년 동안 이렇게 오랜 시간 꾸준히 큰 사랑을 받은 신발도 정말 드물다. 40년 동안 에어 포스 1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인식되며 사랑을 받았는지 몇 차례로 나눠 자세히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첫 번째는 에어 포스 1: 농구화로써의 탄생(AIR FORCE 1 Birth for the Court)에 관한 이야기다.
본격적인 농구 시장으로의 진출
육상 코치와 선수 출신인 빌 바우어만(Bill Bowerman)과 필 나이트(Phill Knight)는 1972년 나이키를 창립하고 혁신적인 제품을 바탕으로 1970년대 미국의 러닝 열풍과 함께 큰 성장을 이루어냈다. 하지만 늘어난 경쟁사들과 줄어드는 러닝에 대한 수요로 인해 새로운 시장이 필요했고, 농구 시장으로 진출을 모색했다.
하지만 앞으로 달리기만 하는 러닝과 여러 방향으로 달리다가 멈추며 점프하는 농구는 신발의 디자인과 기능적인 면 등 여러 사항에서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렇기에 러닝으로부터 시작한 나이키가 농구 시장으로 진출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이키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였다.
나이키의 설립 연도인 1972년 농구화 블레이저(Blazer)와 브루인(Bruin)를 발매했지만, 그 이후 약 10년간은 특별한 신제품을 발매하지 않았다. 그리고 1981년 프렌차이즈(Franchise), 다이너스티(Dynasty) 정도를 발매하였다. 당시로서는 준수한 기능의 신발들이었지만, 기능적으로 크게 특별한 사항은 없었으며 당시에는 컨버스(Converse)와 아디다스(adidas)가 농구 시장을 양분하고 있었다.
나이키는 1979년 테일윈드(Tailwind)를 시작으로 러닝 시장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에어 솔(Air Sole)이라는 최신 쿠셔닝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농구화 시장에서 에어 솔이 성공을 갖다 줄 것이라 믿었다. 그리하여 1980년대 초 에어 솔이 적용된 농구화의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조각가에서 신발 디자이너로
조각을 전공했던 브루스 킬고어(Bruce Kilgore)는 교수의 조언에 따라 산업 디자이너로 전향하였다. 이후 테니스 코트 설계, 가전제품 디자인, 크라이슬러의 자동차 모델러 등을 거쳐 나이키의 디자이너로 입사하였고 처음으로 트랙 스파이크에 대한 업무를 맡게 되었다.
나이키의 첫 번째 직원인 제프 존슨(Jeff Johnson)과 함께 개발한 트랙 스파이크를 착용한 칼 루이스(Carl Lewis)는 1984년 LA 올림픽에서 4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성공적인 트랙 스파이크 이후 맡은 프로젝트가 바로 에어 포스 1이었다.
킬고어의 참여 이전 에어 솔을 적용한 농구화는 개발 중이었지만 난항을 겪고 있었다. 킬고어가 말하길 정돈되지 못한 모습이 마치 미쉐린 타이어 마스코트 같았다고 한다. 킬고어는 기능에 필요한 부분만 남기되 그것이 보기 좋아지도록 만드는 작업에 열중하였다. 그는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 (Form Follows Function)”라는 디자인 격언으로 요약되는 기능주의적 디자인을 추구한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조각 전공 또한 필요 없는 부분을 과감하게 덜어내는 작업방식에 영향을 끼치진 않았을까? 라는 궁금증도 생긴다. 또한 발에서 모든 것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신발만큼, 특히 선수의 능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운동화만큼 기능주의적 디자인 방법이 알맞은 영역도 없다고 생각한다.
현재 나이키의 신발 제조 혁신 이사인 킬고어는 에어 포스 1뿐만 아니라 에어 조던 2(Air Jordan 2), 삭 레이서(Sock Racer), 에어 플로우(Air Flow), 에어 180(Air 180), 에어 프레셔(Air Pressure) 등과 같은 여러 혁신적인 제품을 디자인했으며, 무려 17년에 걸쳐 완성된 Shox 쿠셔닝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대통령 전용기와 같은 안정성과 편안함
1983년 처음 발매된 에어 포스 1(Air Force 1)은 대통령 전용기에서 비롯된 이름처럼 안정성과 편안함을 중점적으로 디자인되었다. 에어 포스 1은 당시의 대다수 농구화처럼 발목 보호를 위해 높은 발목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제품들과는 다른 점이 있었는데, 뒤쪽이 약간 낮은 발목 형태였다. 이러한 형태는 발목을 지지해주면서도 필요한 움직임에 제한이 되지 않도록 도와주었는데, 1980년대 초 발매하였던 하이킹 부츠 어프로치(Nike Approach)의 발목 구조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이와 같은 형태는 현대 농구화에서 또한 응용되고 있다.
또한 발 볼에 따라 신발 끈을 조절하여 묶을 수 있으며, 유연성과 지지력을 함께 제공하는 지그재그 모양의 신발 끈 구멍 배치는 러닝화에서 비롯된 나이키의 노하우가 담긴 디자인이었다.
아웃솔에 있어서 킬고어는 전통적인 지그재그 모양의 청어 가시(Harring bone) 패턴이 아닌 뛰어난 기능의 새로운 형태를 만들고 싶었다. 농구 선수의 움직임을 자세히 관찰한 그는 한발을 고정하며 회전하는 피벗(Pivot) 플레이에서 착안하여 발이 더 잘 회전할 수 있도록 동심원 패턴을 고안하였고, 노트르담 성당의 구조에서 영감을 받은 테두리의 작고 많은 조각이 접지력을 향상시켜 안정성을 높이도록 하였다. 킬고어의 노력으로 탄생한 이전에 없던 형태의 아웃솔은 에어 포스 1의 상징이 되었다.
수많은 시험 끝에 폴리우레탄(PU)으로 감싼 에어 솔을 고무 컵솔(Cup Sole)에 넣어 제작하는 것에 성공하였지만, 에어 솔의 두께 때문에 높아진 굽은 안정성에 대한 우려를 하게 했다. 하지만 킬고어는 발목 스트랩을 적용하여 선수들이 발목의 꺾임에 따른 압박에 따라 발목의 움직임을 조절할 수 있도록 도왔다.
초기 모델에는 스트랩이 고정되어있었지만, 몇몇 선수가 선호하지 않자 탈착식으로 수정하였다고 한다. 스트랩은 미드컷 디자인에서도 계승되었으며, 다양하게 스트랩을 연출하여 신는 것은 에어 포스 1만의 개성이자 상징으로 남게 되었다.
에어 포스 제로
에어 포스 1 또한 대량 생산된 제품과 약간 차이가 있는 일명 에어포스 제로라고도 불리는 초기 프로토타입이 존재하는데, 발등과 측면 부분이 메쉬인 모델과 측면만 메쉬이고 발등에 구멍이 없는 두 가지 모델이 있다.
이후 내부적으로 전체를 가죽으로 만드는 것이 당시로서는 고가였던 판매가격 65달러의 제품에 적절하다고 판단하여 수정하였고 전체가 가죽인 갑피의 통풍을 위해 발등에 많은 구멍을 만들었다. 마케팅과 심미성을 위해 기능을 조금 양보한 것이다.
만약 메쉬가 쓰인 에어 포스 1이 시중에 판매되었다면 지금과 같은 역사를 이룰 수 있었을까?
오리지널 식스
1982년 나이키는 NBA 선수 중 실력 있고 강인한 이미지의 말 그대로 “포스”가 있는 선수들을 찾아가 계약하였다. 마이클 쿠퍼(Michael Cooper), 캘빈 내트(Calvin Natt), 저멀 윌크스(Jamaal Wilkes), 바비 존스(Bobby Jones), 모제스 말론(Moses Malone)과 마이칼 톰슨(Mychal Thompson) 6명은 “오리지널 식스(Original Six)”라고 불리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상징적으로 쓰이는 우주비행사 복장에 에어 포스 1을 신고 촬영한 포스터는 오렌지 카운티(Orange County)의 존 웨인(John Wayne) 공항 활주로에서 촬영되었다.
오리지널 식스 대부분은 NBA 결승전과 플레이오프 등 중요한 경기에서 에어 포스 1을 신고 맹활약을 펼치며 대중들에게 신발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리그 최고의 센터인 모제스 말론과 식스맨 상을 만들게 한 장본인인 훌륭한 수비수 바비 존스가 속한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Philadelphia 76ers)의 팬들은 그들의 신발에 큰 관심을 가졌고 그로부터 시작된 미국 동부 지역에서의 에어 포스 1에 대한 인기는 나중에 일어날 드라마 같은 이야기와 연결된다.
코트 위에서의 활약
파워 넘치는 플레이와 악동 이미지로 유명한 찰스 바클리(Charles Barkley) 또한 데뷔 시즌부터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에서 에어 포스 1을 착용하였고 이후 에어 포스 2와 알파 포스를 신고 코트를 누볐다.
이후 나이키는 안정성을 강조한 에어 포스의 후속 모델들의 발매에 이어 좀 더 가볍고 민첩한 플레이에 알맞은 에어 플라이트(Air Flight)를 1989년에 처음 선보이며 본격적으로 “FORCE”와 “FLIGHT” 제품군을 운영하게 되었고, 마이클 조던에 이어 여러 NBA 농구 선수들과 계약을 맺으며 농구화 시장을 장악해 나갔다.
이후 2000년대에는 모든 경기에서 에어 포스 1을 신은 라쉬드 월라스(Rasheed Wallace)가 대표적이다. 그 또한 필라델피아 출신으로서 에어 포스 1에 대한 뜨거운 사랑 있었다. 4차례 올스타 선정, 1회 파이널 우승에 빛나는 그의 업적은 항상 에어 포스 1과 함께 했다.
나이키는 뒤꿈치에 그의 실루엣이 자수 처리된 여러 색상의 에어 포스 1을 발매해 주었다. 또한 우리 곁을 떠난 코비 브라이언트(Kobe Bryant)도 2002년 11월 24일 밀워키 벅스와의 경기에서 에어 포스 1 미드를 신고 15득점 11리바운드 10어시스트를 올리며 트리플 더블을 기록했다.
단종을 결정하다
이렇게 여러 선수가 농구 코트에서 신으며 활약한 에어 포스 1이었지만 나이키는 1984년 이후 에어 포스 1의 단종을 결정하였다. 당시 나이키는 스포츠용품 회사였고, 기획한 수량을 판매한 후 구형이 된 제품은 신제품 판매를 위해 단종시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가 끝났다면 지금까지 사랑받는 신발이 되진 않았을 테다. 다음에는 어떻게 에어 포스 1이 길거리에서 신어지게 되며 사랑받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해보겠다. 기대하시라.
참고 링크
『Sneaker Freaker: The Ultimate Sneaker Book』 : 426~439p
『Sole Provider 30 Years of Nike Basketball』 : 34~47p ,68~74p, 86~97p
https://en.wikipedia.org/wiki/Air_Force_(shoe)#cite_note-7
https://www.slamonline.com/kicks/show-of-force-bruce-kilgore-nike-kicks
https://sneakers-magazine.com/history/
https://www.highsnobiety.com/p/nike-air-force-1-modern-classic/
https://www.complex.com/sneakers/2012/12/30-things-you-didnt-know-about-the-nike-air-force-1/
https://hypebeast.com/2017/10/nike-air-force-1-designer-bruce-kilgore-interview
https://www.soleknowledge.com/post/nike-air-force-1-the-basketball-sneakers-with-its-roots-in-hiking
https://www.complex.com/sneakers/2017/01/nike-air-force-1-history
https://www.goat.com/editorial/nike-air-force-1-history
https://thesporting.blog/blog/nike-air-force-one-a-h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