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레트로 스니커즈 전시회(Busan Retro Sneakers Collection)
2021년 부산국제신발섬유패션전시회(Passion & Fashion Busan 2021), 일명 패패부산이 10월 28일부터 30일간 3일간 부산 벡스코에서 진행되었다. 부산경제진흥원 신발산업진흥센터의 주관, 부산광역시가 주최로 총 130개 사 210개 부스의 규모로 진행되었고, 신발산업과 관련된 행사라고 보면 된다.
올해 21회째를 맞이한다는 패패부산 행사는 제2의 도시라고는 하지만, 부산이라는 서울 외 지역에서 열리는 행사, 일반 대중보다는 관계자들이 참석하는 행사, 마케팅 & 홍보의 한계, 코로나 19 유행, 진행 미숙함 등으로 몇 가지 괜찮은 콘텐츠를 갖추었음에도 아주 조용히 진행되고 있다.
국가 기관 주도의 이벤트들이 대부분 이런 한계점을 갖고 있지만, 신발 산업과 관련된 이벤트는 거의 유일한 행사 중 하나이니 신발을 사랑하는 우리가 모두 꾸준히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번 2021 패패부산에서 개인적으로 주목할 만한 행사는 부산 레트로 슈즈전(Busan Retro Sneakers Collection)이라는 타이틀로 80~90년대 부산공장에서 생산된 희귀 스니커즈의 모음 전시였다. 인터뷰도 진행했던 스니커헤드인 simonlab52(@simonlab52)님의 개인 소장품들로 구성된 전시로 매우 의미 있는 이벤트로 기록되었다.
무엇보다 이 전시는 순전히 simonLab52님 혼자 전시의 처음부터 끝까지-구성과 기획, 전시 운영까지 모든 것을 홀로이 해냈다는 점이다. 신발산업진흥센터의 지원과 주변의 많은 이들의 도움이 있었지만, 홀로이 이런 전시를 만들어낸 것은 국내 스니커즈 역사에서도 좋은 기록으로 남을 것이고 앞으로 보기 힘들 수 있다.
아니, 앞으로 이런 전시가 다시 한번 진행된다면 혼자 하게 만들지 말자. 다음에는 더 적극적인 지원과 후원이 뒷받침되어야 할 테다. 적어도 당신이 신발을 좋아한다면 말이다.
아마도, 유튜버 와디의 영상으로도 소개되어 이미 몇몇 분들은 영상으로도 감상했을 것이다. 전시가 종료된 이후, simonlab52님은 부산신발진흥센터의 슈넷(shoenet)에 후기를 1~3편으로 나누어 게시했다.
하지만, 슈넷의 시스템이 오래된 터라 편히 글을 보기는 상당히 불편하다. 서버도 상당히 느린데, 해외 서버를 이용하나? 아니면 누가 서버로 비트코인이라도 캐는건가? 싶을 정도다. 하아…
그래서, 스니커즈서울은 simonlab52님의 동의, 협조로 글을 재구성하고 편집해 한 개의 글로 다시 소개한다. 신발 생산에 관련된 전문 용어들이 많지만, 그래도 한번 읽어보길 권한다. 이런 내용을 담은 글 정말 몇 개 없다. 그리고 공장들에 대한 소개는 상당히 재미있다.
레트로 스니커즈 전시회의 뒷 이야기 by simonlab52(Behind of Busan Retro Sneakers Collection by simonlab52)
짧았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패패부산이 10월 30일 마무리되었다. 특히 이번 전시회는 매년 열렸던 기존의 신발 전시회와 다르게 20~30대 층도 적극적으로 참석하여 남녀노소가 잘 어울릴 수 있었던 전시가 되었다. 그중에서도 남녀노소 반응이 좋았던 부산 레트로 스니커즈 전시회(Busan Retro Sneakers Collection)의 못다 한 이야기를 써보고자 한다.
부산의 1세대 신발공장(Shoes Factory of Busan1st Generation)
이번 패패부산에서 가장 반응이 좋았던 부스가 있다. 유튜버들 또한 가장 큰 이목을 끌어 영상으로 나왔으며 남녀노소가 흥미와 추억에 젖은 부스였다. 8090 레트로 스니커즈 전시회를 기획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80~90년대 부산을 경제도시로 키운 효자산업이자 산업 일꾼들의 헌신을 통해 지금의 경제도시인 부산을 건설한 주역들을 회상하고자 이번 전시를 열었다. 또한 이번 전시회는 부산에서 열렸기 때문에 타 지역 구독자들과 하지 못한 이야기를 칼럼을 통해 소개하려 한다. 우선 아래의 1세대의 수출 공장 중 가장 큰 규모였던 5곳을 살펴보자.
국제상사
사실 프로-스펙스(ProSpecs) 브랜드는 국제상사가 만든 브랜드가 아닌 기존의 브랜드를 인수하여 재 런칭한 케이스다. 시초는 스펙스라는 미국의 브랜드였다. 하지만 한국과 대만에 신발 생산하고 미주나 유럽에 판매했으나 대금 납부를 하지 못해 국제상사가 인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국제상사가 대대적인 개혁 후 런칭하면서 프로-스펙스를 고가 라인 스펙스는 중저가 라인으로 분류하여 진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화고무
삼화고무는 1974년에 나이키와 최초로 독점 계약을 했다. 그러나 계약을 하게 된 계기는 꽤 흥미롭다. 당시 송승호 수출 담당 이사는 나이키의 필 나이트 회장이 ‘삼화고무에 가겠다’라는 전화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나이키는 그저 그런 브랜드 중 하나였고 삼화고무로서는 그런 전화는 빈번히 오기 때문에 메모를 해두고 잊어버린 것이다. 마침 그날 미국의 CTC라는 브랜드 에이전시 회장이 한국에 모델 수주에 관련하여 방한하는 날이었고 제일 규모가 컸던 국제상사에 가는 중에 공항에서 눈도장만 찍고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 송승호 이사의 등을 친 사람이 있는데 바로 필 나이트 회장이었으며 송승호 이사와 극적인 만남으로 이어져 나이키와 5년간 독점 계약을 하게 된 유명한 일화가 있다.
태화고무
나이키의 영원한 클래식으로 평가받는 에어 포스1 하이를 최초로 개발 및 생산을 한 공장으로 유명한 태화고무. 그러나 한때 사라질 위기였으나 미국의 리테일 스토어 덕분에 기적적으로 살아날 수 있었다.
나름대로 NBA 선수들을 내세워 혁신적인 광고들을 하여 좋은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나 나이키가 생산 중지하려 했다. 하지만 미국의 볼티모어에 있는 다운타운 라커룸과 신데렐라 슈즈, 찰리 루도 스포츠의 3곳의 리테일 스토어 덕분에 재발매를 하게 되었고 지금의 에어 포스 1 모델이 롱런할 수 있게 되었다.
동양고무
삼화고무와 나이키의 독점계약이 끝난 후, 나이키는 여러 한국 공장에 오더를 주게 되었다. 그러다 동양고무가 1980년에 사명을 화승으로 바꾸면서 합작하여 화승 나이키를 출범했다.
특히, 동양고무와 나이키의 관계는 정말 중요한 관계였다. 비록 나이키가 화승과 계약을 조기 종결했지만 당시 개발했던 모델을 보면 나이키의 역사에서 한 획을 그은 중요한 모델들을 담당했다. 바로 에어 조던 1(Air Jordan 1), 덩크(Dunk), 반달(Vandal)이다.
에어 조던 1, 덩크는 농구를 좋아하거나 패션에 민감한 젊은 층은 잘 알 것이다. 그리고 반달 모델의 경우 터미네이터 1에서 카일 리스가 벌거벗은 채로 과거로 돌아와 매장에서 옷을 갈아입을 때 신발을 집어가는 장면이 있는데 그 모델이 바로 반달 하이 제품이다.
이런 굵직한 모델들을 개발했으나 아쉽게도 리복과 이중 계약 관계로 인하여 나이키와의 관계가 일찍 끝났지만, 나이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다.
대양고무
대양고무는 80년대 후반 90년대 초 아디다스와 꽤 굵직한 모델들을 담당했다. 물론 대양고무는 자사 브랜드인 슈퍼카미트를 대부분 생산했고 자회사 대봉이 아디다스를 주로 생산했다.
바야흐로 2년 전 아디다스에서 자신들의 걸작 모델인 ZX 토션(ZX Torsion)을 레트로 시키면서 올해 이큅먼트(EQT) 프로젝트 30주년 일부 모델들을 발매한 것인데 이 모델 중 대다수 제품이 대봉의 작품이다.
특히 아디다스 토션이 최초로 들어간 ZX 토션 모델을 필두로 1991년과 1993년에 발매한 모델들은 아디다스가 다시 기술력에서 우위를 점하는 프로젝트인 이큅먼트 시리즈(adidas EQT)의 러닝 부분에 상당한 기여를 한 것이다.
혁신적인 디자인만큼 당시 개발에 공을 들인 덕분에 지금도 국내를 비롯한 해외 스니커즈 마니아 그리고 아디다스 본사에서 잊을 수 없는 모델이기도 하다.
브랜드 소개
이렇게 5개 굵직한 수출 신발 대기업을 필두로 부산의 신발 산업은 엄청난 호황을 누렸다. 특히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공장들이 5개가 부산에 집약되었으며 베이비붐 세대의 풍부한 인력과 저렴한 인건비 그리고 선진국에서 생산된 신발 못지않은 품질 덕분에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브랜드가 몰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생산을 위해 부산을 찾아온 브랜드를 본다면 아래와 같다.
이외에 더 많은 브랜드가 한국에서 신발을 생산했다. 특히 화승 나이키 시절 ‘전 세계 나이키 70%는 한국에서 만든 것입니다’라고 지면 광고에 실릴 정도였으니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예측 가능할 것이다. 1세대 시절의 신발부터 차례로 살펴보자.
당시의 신발 트렌드
보편적으로 70~80년대에 등장한 신발들의 특성은 폭싱 테이프가 둘러진 벌커나이즈드 스니커즈(Vulcanized Sneakers), 컵솔 스니커즈(Cupsole Sneakers), 나일론 EVA 스니커즈(Nylon EVA Sneakers) 등 대표적 모델이라 볼 수 있다.
첫 번째로 벌커나이즈드 스니커즈(Vulcanized Sneakers)는 생고무에 황을 첨가하여 고열과 고압으로 가공하면 고무의 탄성과 경도가 단단하게 변한다. 이때 황을 첨가하는 것을 벌커나이즈드(Vulcanized)라고 부르며 찜통을 영어로 오토클레이브(Autoclave)로 불린다.
국제상사에서 컨버스와 프로-케즈 브랜드의 주력 제품이었으며 프로스펙스 역시 많은 모델을 생산했다. 컨버스의 경우 국제상사에서 24개의 제조 라인에서 생산할 정도였는데, 현재 세계 신발공장의 1위라는 파우첸(Pou Chen Corporation)은 당시 4개 제조 라인 밖에 없어 컨버스가 국제상사에 가서 벤치마킹하라고 할 정도였으니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다음으로 컵솔 스니커즈(Cupsole Sneakers)는 1960년대 아디다스에 의해 개발된 방식으로 스탠 스미스(Stan Smith), 슈퍼스타(Superstar)가 대표적인 예시로 보면 될 것이다. 신발의 단면을 잘라보면 컵 형태처럼 생겼다고 하여 불리는데 벌커나이즈드처럼 폭싱 테이프를 옆쪽에 두르는 방식이 아닌 미드 솔이 일정한 형태로 높게 올라와 있는 형태이다.
생산방식으로 러버를 가공하는 방식과 PU로 만드는 2가지가 존재한다. 나이키에서 걸작으로 평가받는 베스트셀러 모델 에어 포스 1 하이 제품은 1982년 태화고무에서 최초로 개발 및 생산이 되었다. 컵솔 신발의 특성상 장시간 착용 시, 플렉스 존에 본딩 갭이 생기는데 미드 솔 전체 아리안스 재봉을 추가하여 장시간 신더라도 품질의 문제를 줄일 수 있는 공정 또한 추가했다.
마지막으로 EVA 스니커즈(Nylon EVA Sneakers)다. 당시 러닝화에 접목되어 굉장한 혁신으로 불렸다. 덧붙여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솔이며 가볍고 쿠셔닝이 상단의 2가지 보다 월등히 좋았다. 단점으로 장시간 신거나 몸무게 많이 나가는 사람들은 빨리 꺼지는 문제가 발생했다.
그러나 솔의 발전과 더불어 어퍼의 공정 또한 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러너들에 특화된 캘리포니아 공정까지 더해져 피팅감까지 무장하여 각자의 기술력을 과시하던 시기였다.
현재 최신 기술력이 집약된 신발들에 비하면 라이프스타일에 불과한 신발들이지만 비단 인기는 근래에 발매한 신제품들 보다 훨씬 인정받고 있다. 이것이 레트로 스니커즈의 변치 않는 가치는 소중한 것이라 말하는 이유다.
부산의 2세대 신발공장-1(Shoes Factory of Busan 2nd Generation)-1
1세대 수출을 전속 담당하는 5개의 큰 공장들을 필두로 군소 공장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 군소 공장들은 1세대 공장의 어퍼(Upper)나 솔(Sole)을 납품하거나 완제품 오더를 넘겨받기도 했다. 추후 브랜드와 계약에 성공하여 2세대 공장들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2세대 공장들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하단의 사진을 보자.
태광실업
군소 공장 중 하나인 태광실업은 박연차 회장에 의해 1971년에 정일산업으로 설립되었다. 여느 공장처럼 여러 브랜드의 제품을 생산하다 1987년 동양고무가 나이키 에어 맥스 1 개발에 손을 들어버렸는데 이 사건은 태광실업에게 천재일우의 기회가 되었다.
이 외장형 에어 맥스 1 개발 및 생산에 성공하여 나이키와 함께 엄청나게 성장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전에 진행했던 여러 브랜드의 오더는 종료되었고 나이키만 개발 및 생산하게 되었다. 이후 솔과 몰드 개발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개발 능력을 보유하게 되었으며 나이키 역사에 빼놓을 수 없는 에어백 기술이 들어간 에어 맥스 1, 180, 93, 95, 97 등의 제품들이 태광실업의 작품이다.
삼호산업
박연차 회장의 둘째 형인 박연구 회장에 의해 1974년 태광케미를 설립되었다. 태광실업과 마찬가지로 여러 브랜드의 제품을 생산하다 1987년에 아디다스와 비즈니스 협약을 맺어 아디다스만 전담하여 생산하게 되었다.
삼호산업은 아디다스 역사에 빼놓을 수 없는 모델과 스토리가 있는데 1988년에 당시 공장 단가가 30불이 넘는 포럼 하이를 아디다스 프랑스로부터 트랜스퍼 받아 생산하였으며 추후 하이 모델을 개량한 포럼 미드 모델을 개발했다.
그리고 1990년에는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독일 국가대표가 우승하는데 선수들의 전용 축구화를 특별히 제작해 주기도 하였다. 대봉과 더불어 ZX 토션 시리즈와 이큅먼트 시리즈 등 고가의 제품을 개발 및 생산했던 아디다스 역사에 빼놓을 수 없는 공장이다.
태광고무산업
박연차 회장의 첫째 형인 박연만 회장에 의해 1981년에 설립되었다. 태광고무 역시 나이키와 계약을 맺어 진행하였으며 아웃도어와 바스켓볼, 트레이닝화 전담하던 공장이었다. 특히 나이키에서 혁신적인 모델로 평가받았던 에어 트레이너 허라취 모델은 태광고무산업이 개발 및 생산을 담당했다.
세원
김병춘 회장에 의해 1976년에 국제양행으로 설립이 되었다. 세원은 기술이 좋은 공장으로 유명했는데 그 이유는 나이키와 아식스의 브랜드를 진행하면서 트랙 & 필드와 러닝 제품을 전문적으로 담당했다.
아식스의 경우 일본인들의 장인 정신 때문에 신발 만들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는데 요구사항이 많고 품질에 민감하기로는 아디다스 독일인과 최고를 다툴 정도라 불렸다. 그리고 신발업계에 종사하는 연배가 있는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세원 공장을 이야기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의 전설 마이클 존슨의 황금색 나이키 신발 역시 세원의 작품이다. 또한 나이키 테니스 카테고리도 세원에서 담당했는데 마리아 샤라포바, 로저 페더러 등 걸출한 테니스 스타들의 신발까지 개발과 생산을 했던 기술력이 뛰어난 공장이었다.
당시의 신발 트렌드
EVA 소재가 지나고 PU(Poly-Urethane is Synthetic) 계통의 솔의 등장했다. EVA보다 꺼짐이 덜하며 쿠셔닝이 좋다. 또한 제작 방식이 쉽기 때문에 까다로운 형태의 디자인 또한 가능하게 되었다. 특히 나이키의 혁신이라 불리는 외장형 에어백이 장착된 에어 맥스 1 역시 PU로 생산했다.
이를 토대로 각 브랜드에서도 특색이 담긴 PU 계열의 신발이 등장하게 되었다. 다만 PU의 단점이 존재하는데 EVA보다 무게가 무겁고 공기 중의 수분으로 인하여 가수분해가 발생하는 문제점이 있다.
PU의 고질적인 문제점으로 인해 EVA의 방식에 변화가 생겼다. 바로 IMEVA(=Injection Phylon)와 CMEVA(=Compression Molded Prefoam)의 등장인데 IMEVA는 EVA 원료를 고열로 녹여 몰드에 액을 주입하여 발포하는 방식이고 CMEVA는 가공한 EVA 폼(=Prefoam)을 몰드에 넣어 성형하는 방식이다.
두 제품 모두 가볍고 기존의 EVA보다 내구성이 좋았으나 역시 장시간 착용 시, 발생하는 고질적인 꺼짐 현상은 계속 있었다. 게다가 IMEVA는 금형에서 발포를 하기 때문에 초창기 생산에서 PU보다 수축률 부분에서 불량률이 높아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그나마 CMEVA는 IMEVA보다 복잡한 구조의 형태와 일정한 형태로 제작이 가능한 점이 있지만 공정이 많아 생산율이 높지 못한 각각의 장, 단점이 있다. 추후 IMEVA는 색다른 방식으로 발전한다.
바로 IU(Phylite)라고 불리는 방식인데 IMEVA와 고무를 섞어서 만든 방식이다. 리복이 90년대 중반에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3D UltraLite가 붙는 제품군들이 대표적인 예시라 볼 수 있다.
IMEVA나 CMEVA보다 무게는 조금 나가지만 내구성이 올라가고 아웃 솔이 없는 형태로 사용하거나, 사용량을 최소화(가장 많이 닳는 토와 힐 부분에만 아웃 솔 사용)할 수 있게 되어 비용을 줄일 수 있게 되었다. 주로 러닝이나 트레이닝화에 많이 접목이 되고 있다.
부산의 2세대 신발공장-2(Shoes Factory of Busan 2nd Generation)-2
앞의 글에 이은 부산의 2세대 신발공장에 대해 더 이야기해본다.
화승
1980년 동양고무에서 화승으로 사명이 변경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나이키는 삼화고무와 독점 비즈니스는 끝난 상태였기 때문에 국내 여러 공장에서 생산 중이었다. 그 오더를 받던 공장 중 화승의 계열사인 풍영화성과 기술 제휴로 1981년에 화승 나이키를 설립했다.
그러나 4년 후 화승과 나이키는 비즈니스를 조기 종결하게 되었는데 이유는 나이키의 무리한 단가 문제와 리복의 생산 때문이었다. 나이키와 결별한 화승은 리복과 비즈니스를 진행함으로써 엄청난 동반성장을 하게 되었다.
1982년 화승이 에어로빅화인 프리스타일 모델을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마침 미국에서 에어로빅 붐이 불었는데 당시 트렌드와 맞물려 엄청난 인기를 끌며 나이키를 꺾고 리복이 세계 최고 브랜드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7년 뒤인 1989년에 어퍼에 공기를 주입하여 피팅 조절이 가능한 더 펌프(The Pump) 농구화를 발매하여 높은 기술력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으며 1993년에는 미래지향적 신발인 인스타 펌프 퓨리(Insta Pump Fury)를 발매를 하는 등 나이키 못지않은 혁신적인 제품을 개발 및 생산하는 등 부산의 신발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
삼양통상
1957년 허정구 회장이 삼양통상을 설립하여 1979년에 신발 비즈니스를 시작하였다. 이후 1985년에 부산에 신발공장을 짓고 마침 화승과 합작회사인 ‘화승 나이키’가 조기 종료가 된 시점에서 1986년에 나이키와 합작회사인 ‘삼나 스포츠’를 설립하였다.
사실, 삼양통상은 필 나이트 명예회장과 인연이 깊다. 바로 허정구 회장의 아들인 허광수 회장이 미국 스탠퍼드 대학원에서 유학 당시 필 나이트와 친구가 되었다. 그 관계가 추후 발전하여 전폭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에어 플라이트 허라취, 에어 다윈 등의 좋은 주문을 받기도 하였으나 아쉽게도 삼양통상은 신발 비즈니스 부문을 삼호에 매각 후 자재 비즈니스만 진행하고 있다. 당시 필 나이트는 삼양통상이 신발 비즈니스를 이어 갔으면 하는 아쉬움을 나타냈다고 했다.
창신INC
1981년 정환일 회장이 대신교역을 설립하였다. 여느 공장과 다르게 대신교역은 나이키의 물류 회사로 시작으로 신발 생산까지 하게 된 케이스로 알려져 있다. 초창기 신발 생산은 갑피를 주로 생산하여 납품을 해오다 1985년부터 완제를 생산해오던 중 1987년부터 나이키 제품을 생산했다.
창신INC는 도요타 LEAN 시스템을 나이키 공장 중 최초로 도입하여 낭비의 최소화를 이뤄냈으며 혁신적인 공장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로 인해 NOS 교육센터(제조과정에서 낭비를 최소화하기 위한 교육을 진행하는 곳)가 생겨 나이키와 비즈니스를 하는 세계의 공장들이 창신으로 교육을 들으러 방문하기도 하였다.
풍원제화공업
1983년 류부열 회장이 영우산업을 설립하였다. 2세대 공장 중 막내 공장에 속하며, 원래 풍원은 프로 케즈와 비즈니스를 먼저 시작했다. 당시 프로케즈 신발의 인기가 좋아 풍원은 빠르게 회사를 키울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 아디다스를 하던 공장인 대봉은 부도가 났고 삼호는 아디다스와 비즈니스를 끝내고 나이키로 갈아탔던 시점이었다. 이때 풍원이 아디다스와 비즈니스를 성사시켜 국내 마지막 아디다스 공장의 계보를 잇게 되었다.
삼호에서 생산하던 제품군들인 슈퍼스타(Superstar), 포럼(Forum) 등의 고가 제품군을 넘겨받게 되었다. 추후 중국 대련에 생산 공장을 지으며 국내는 하이테크 개발 센터 신사옥을 지음과 동시에 한국 아디다스 개발 센터와 동시에 운영이 되었다. 이때 국내에서 최초로 태권도화를 개발 및 생산하여 해외에 수출을 하고 엄청난 판매량를 올리는 기염을 보여주었다.
Final : 현재와 미래
현재 2세대 공장들 중 1세대 공장처럼 사라진 곳도 있으며 언급이 되지 않은 한국의 공장들이나 해외에서 뿌리를 내린 한국계 공장도 존재한다. 그러나 아직 대만계 기업의 아성이 높다고 하지만 다시 한국의 기술과 생산성 덕분에 옛 시절의 영광을 찾아오고 있다.
물론 다수의 사람은 OEM, ODM을 생산하는 공장은 결국 해외 브랜드의 하청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비즈니스가 끊길 것이 아니냐? 라는 꼬리표가 아직도 달고 다닌다. 그러나 기술력이 좋고 브랜드와의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공장은 비즈니스가 끊길 일은 굉장히 힘들다고 볼 수 있다. 비슷한 사례를 들어보면 디카프리오 스니커즈로 유명한 올버즈(allbirds)는 노바인터내쇼널과 전략적 파트너십 관계다.
올버즈(allbirds)
올버즈(allbirds)는 미국의 실리콘밸리에서 설립된 친환경 신발 기업으로 유칼립투스 나무, 사탕수수, 양모, 재활용 플라스틱병 등을 이용해 신발을 만든다. 그중에서 양모 원단을 이용한 스니커즈를 만들기 위해 신발의 나라인 이탈리아에서 1년 동안 매달렸으나 실패했다.
아쉬움이 컸던 차 당시 폐업까지 생각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던 노바인터내쇼널을 소개받게 되었고 노바인터내쇼널 역시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 달 만에 바이어가 원하는 퀄리티의 샘플을 개발해 내게 되어 올버즈와 함께 동반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
이렇게 공장은 브랜드와 돈독한 관계를 맺기 좋은 방법은 타 공장보다 뛰어난 기술력을 지닐 수 있다는 사례를 알 수 있다.
브랜드 런칭(brand launching)
다음으로 브랜드 런칭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브랜드를 런칭하여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대한민국에서 브랜드로 자리 잡기란 쉽지 않으며 브랜드로써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은 제한적이다.
더군다나 한국의 인구는 5천만 명이며 성장이 멈추어있는데, 일반적으로 내수시장이 원활히 돌기 위해서는 인구 1억 명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한국 시장만 생각할게 아니라 미국이나 일본, 중국 등 적어도 인구가 1억 명이 넘는 해외시장을 목표로 해야 한다.
뉴발란스(New Balance)
반면 다른 예시로 뉴발란스 코리아의 걸작이라 할 수 있는 뉴발란스 카라반(New Balance karavan) 샌들을 살펴보자. 기존에 한국에서 볼 수 없던 트렌디한 디자인의 샌들로 한국 시장에서 파란을 일으켰고, 히트 상품이 되어 유행 후 중국에 입소문이 퍼져 역수출한 사례다.
중요하게 볼 사항은 중국은 한국의 히트 상품이라면 중국 시장에서 통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며 이런 점을 이용하여 진출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아직도 한국은 공장의 기술력이나 브랜드로서의 잠재력은 무궁무진하기에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나아갈지에 대해 전략을 짜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 볼 수 있다.
끝맺음으로 이러한 전략을 바탕으로 정부와 기업의 협업을 통해 부산의 찬란했던 신발 역사가 다시 전성기를 맞이할 날이 머지않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