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스포츠 브랜드 시대의 종말(The End of the Sports Giant era)

대형 스포츠 브랜드 시대의 종말(The End of the Sports Giant era)

스포츠 브랜드 시대의 황혼

90년대 중반에 탄생해 국내 스포츠 시장을 풍미했던 한국 스포츠 브랜드 라피도(Rapido), 프로스펙스(Prospecs), 르까프(Lecaf)를 기억하시는가? 안타깝게도 이 브랜드들을 뚜렷이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1970~80년대 해외 브랜드의 신발을 위탁 생산(OEM)하며 내공을 다진 한국 신발 산업은 한때 국내 대표 수출품 중 하나로 꼽힐 만큼 성장했다.

그러나 ‘제조를 잘하는 것’‘브랜드를 만드는 것’은 완전히 다른 영역의 이야기다. 제조는 품질과 원가, 납기, 양산 능력을 겨루는 게임이고, 브랜드는 대중의 욕망과 문화, 서사, 유통, 반복 소비를 이끌어내는 게임이다. 한국 신발 산업은 전자의 게임에서 성공을 거두었지만, 아쉽게도 후자의 문법을 정립하는 데 실패했다.

대형 스포츠 브랜드 시대의 종말(The End of the Sports Giant era) 1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방정식

그런데 지금 흥미로운 변화가 생기고 있다. 과거의 문제는 ‘제조 역량만으로는 브랜드가 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지금의 문제는 반대로 ‘제조 생태계의 기술 축적이 글로벌 브랜드의 기술 프리미엄을 빠르게 약화시킨다’는 것이다.

최근 3월, 일본 도쿄 마라톤 대회에서 2:05:59 기록으로 종합 12위, 일본인 1위를 차지한 오사코 스구루(@suguru_osako)는 리닝 신발을 신고 뛰었다. 이미 그는 작년 12월, 스페인 발렌시아 마라톤에서 리닝의 카본 레이싱화인 페이디안 6 엘리트(Feidian 6 Elite)를 착용하고 2시간 4분 55초를 기록하며 일본 신기록을 경신한바 있다. 아식스와 미즈노의 나라인 일본에서 나이키와 아디다스가 아닌 중국 신발을 신고 일본 기록을 갱신하고 있는 것이다.

2026 도쿄마라톤에서 일본인 1위를 기록한 오사코 스구루(Suguru Osako, 
TOKYO Marathon 2026)
2026 도쿄마라톤에서 일본인 1위를 기록한 오사코 스구루(Suguru Osako,
TOKYO Marathon 2026)

국내에서도 리닝 뿐만 아니라 다양한 중국 브랜드의 러닝화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적토끼라고 불리는 리닝 레드 헤어 시리즈(Li-Ning Red Hare)는 좋은 후기가 넘치며 그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무엇보다 가성비가 좋다. 일반적으로 카본화가 30만 원 전후인데 비해서 리닝 러닝화는 10만 원 중후반에서 구매가 가능하다. 

단순히 중국 브랜드가 성장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스포츠 브랜드 산업의 기술 해자(Tech Moat)가 얇아지고 있다. 신발은 하이테크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로우테크다. 소재, 금형, 쿠션, 갑피, 카본 플레이트, 접착, 양산 노하우가 모두 중요하지만 누구든지 빠른 시간 내에 복제가 가능하다. 특허가 있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만료되고 법적 보호를 받더라도 실질적인 속도 싸움에서는 한계가 있다. 제품 사이클은 빠르고 소비자는 가격에 민감하며 아시아 제조 생태계는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따라온다.

신발의 기술 개발에 있어서는 아시아 국가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나이키의 에어에 대한 특허가 끝나고 기술 개발 전담 부서였던 이노베이션 키친(Nike Innovation Kitchen)이 망가지면서 나이키의 미국 내에서의 기술 개발 역량은 회복 불가능이 되었다.

이를 회복하려는 노력으로 2025년 포틀랜드 지역에 온 러닝, 아디다스, 언더아머, 룰루레몬까지 참여한 이노베이션 센터 Made in Old Town(MiOT)이 만들어졌다. 그들은 콘셉트를 리딩 할 뿐 실제 기술을 양산 가능한 제품으로 만드는 것은 다르다. 그 역량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아시아 제조 생태계를 바탕으로 할 것이다. 머쓱하게도 2026년 5월, 메이드 인 올드 타운 사업 운영 주체가 대출금을 제때 납입하지 못하는 바람에 프로젝트는 종료되었다.

혹자는 IP 통제를 통해서 기술 개발을 브랜드가 통제 가능하다는 반론을 이야기할 수 있다. 마이클 조던은 점프맨 로고를 따라 해 수익을 올리던 중국의 차오단(Qiaodan, 乔丹)에 80여 건의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이 소송은 2021년, 중국 법원이 최종 마이클 조던의 편을 들어주었고 차오단 측에 위자료 4만 6천 달러(2021년 당시 약 5천만 원) 지급을 명령했다. 8년 동안의 소송의 결과가 한화로 약 5천만 원이다. 35만 달러도, 35만 비트코인도 아니다.

신발 산업이 AI와 같은 하이테크가 아닌 로우테크 비즈니스이기 때문에, 빠르게 개발하고 마케팅을 통해 판매를 해야 한다. 그런데 그 사이에 아시아 국가, 특히 중국이 빠르게 카피를 해버린다. 더 좋은 가격에 비슷한 제품을 만든다. 다년간의 하청 업무로 기술 개발의 격차는 존재하지 않는다. 90년대 한국은 미국의 소송을 두려워했겠지만 지금의 중국은 그렇지 않다.

조던(Jordan) vs. 차오단(Qiaodan)
조던(Jordan) vs. 차오단(Qiaodan)


글로벌 브랜드는 어떻게 만들어 졌을까?

과거의 답은 명확했다. 기술에 선수의 서사를 붙이고 대중 미디어로 확산시키고 그것을 문화로 만들면 됐다. 나이키가 이 공식을 만들고 성공 신화가 되었다. 나이키는 단순히 좋은 운동화를 만든 회사가 아니었다. 조던을 통해 농구화를 문화로 만들었고 스포츠를 개인의 신념과 정체성으로 확장했다. 아디다스도 마찬가지였다. 운동화가 힙합, 스트리트, 패션과 결합하면서 운동화(athletic shoe)는 스니커즈(sneakers)가 되었고, 스니커즈는 다시 문화가 되었다. 이 과정을 통해 스포츠 브랜드는 단순한 제조업체가 아니라 글로벌 문화 기업이 되었다.

호카(HOKA)도 이 길을 따라갔다. 처음에는 러닝화였지만 일본 스트리트 브랜드 엔지니어드 가먼츠(Engineered Garments)와의 협업을 통해 스니커즈 신으로 들어왔다. 온 러닝도 로에베와의 협업을 통해 퍼포먼스 브랜드에서 패션과 라이프스타일 영역으로 확장했다. 그런데 이 루트가 예전만큼 강하게 작동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호카 오네오네 x 엔지니어드 가먼츠(Engineered Garments x Hoka One One FW21 )
호카 오네오네 x 엔지니어드 가먼츠(Engineered Garments x Hoka One One FW21 )

가장 큰 이유는 미디어 환경의 변화다. SNS 이전에는 사람들이 소비하는 문화가 지금보다 훨씬 집중되어 있었다. 한 시대를 관통하는 노래, 광고, 운동선수, 영화, 캠페인이 있었다. 마이클 잭슨의 빌리 진(Michael Jackson – Billie Jean)을 온 가족이 같이 듣던 시대에는 대중문화의 중심이 존재했다. 그런 시대에는 하나의 브랜드 메시지가 전 세계로 퍼질 수 있었다.

지금은 다르다. 아빠가 보는 콘텐츠, 엄마가 보는 콘텐츠, 아이가 보는 콘텐츠가 다르다. 같은 집 안에서도 소비하는 미디어가 완전히 갈라진다. 브랜드 입장에서는 노출해야 할 채널은 많아지고 메시지의 일관성은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마케팅 비용은 올라가는데 효율은 떨어진다. 하나의 글로벌 브랜드가 성장하고 안착시키는 데에 소요되는 비용이 과거보다 훨씬 비싸졌고 지속기간은 훨씬 짧아졌다.

SNS는 글로벌 문화를 더 빠르게 연결했지만, 동시에 문화를 더 잘게 쪼갰다. 미국 10대와 한국 10대가 같은 NBA 영상을 볼 수 있는 시대지만, 그들이 같은 브랜드를 같은 방식으로 선호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모두가 같은 것을 볼 수 있지만 모두가 같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 변화는 스포츠 브랜드에 매우 중요하다. 과거에는 운동화가 문화가 될 수 있었다. 특정 신발을 신는 것이 특정 선수를 좋아한다는 뜻이었고, 특정 음악과 스트리트 문화를 공유한다는 뜻이며, 특정 세대에 속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지금 10대에게 ‘가장 신고 싶은 신발이 뭐냐?’고 묻는다면, 그 질문 자체를 이상하게 느낄지 모른다. 그들에게 신발은 더 이상 문화적 선언이 아니라 그냥 신발일 수 있다.


상품에서 문화로, 다시 상품으로 돌아가다

현재 글로벌 스포츠 브랜드의 위협은 점유율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다. 더 큰 리스크는 카테고리 전체가 문화적 프리미엄을 잃는 것이다. 운동화가 다시 신발이 되는 순간, 스포츠 브랜드의 가치 평가는 달라진다. 브랜드가 문화적 프리미엄을 유지할 수 있다면 높은 가격, 높은 마진, 높은 수익이 가능하다. 하지만 제품이 다시 기능재가 되면 소비자는 가격과 편안함을 더 냉정하게 비교한다. 시장에서는 200달러짜리 프리미엄 러닝화보다 100달러짜리 편한 러닝화가 더 강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브룩스(Brooks)스케쳐스(Skechers)가 매우 흥미롭다. 브룩스는 광고를 크게 하지 않아도 러너들이 알아서 구매하는 브랜드다. 스케쳐스 역시 100달러 안팎의 대중적 기능성 컴포트화(Comfort Footwear)에서 강력한 포지션을 가지고 있다. 둘 다 나이키처럼 거대한 문화 서사를 만들지 않지만 소비자가 반복 구매하는 기능적 이유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앞으로 스포츠 브랜드 산업의 중요한 질문이 될 수 있다.

제조만으로는 브랜드가 되기 어렵고, 기술만으로는 지속 가능한 해자를 구축하기 힘들다. 과거 한국 신발 산업이 이를 증명했고, 지금은 중국 브랜드와 아시아의 제조 생태계가 그 역사를 반복하고 있다. 마케팅만으로 문화를 만들기도 어렵다. 소셜 미디어 시대의 미디어 파편화가 이를 방증한다. 나아가 스니커즈 문화만으로 영원한 프리미엄을 유지하는 것 역시 불가능에 가깝다. 변덕스럽고 영리해진 10대 소비자의 변화가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대형 스포츠 브랜드 시대의 종말(The End of the Sports Giant era)

과거에는 뛰어난 제품, 위대한 선수, 매스 미디어 그리고 스트리트 문화가 하나의 거대한 방향성을 향해 유기적으로 움직였다. 그 시절 운동화는 스포츠를 넘어 하나의 문화였고, 그 문화는 강력한 브랜드 제국을 건설했다. 이제 우리는 ‘나이키가 다시 턴어라운드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넘어, ‘과연 지금 이 시대에 제2의 나이키라는 브랜드 제국이 탄생하는 것이 가능한가?’를 물어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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